세브란스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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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일주일 동안 집에서 심심했던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기로 했다. 가까운 이화여대 교정에 가서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저녁 시간에 마땅히 갈 장소가 아니고 뛰어 다닐 평지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연세대 교정에 산책을 가기로 했다. 연세대 캠퍼스라고 해서 특별히 아이들이 가서 구경할 만한 것은 본관 근처까지 가야만 담쟁이 덩굴에 뒤덮인 신기한 건물, 신과대 건물을 볼수 있겠지만 적어도 백양로 주위의 평지길을 거닐 수 있다면 충분한 산책이 된다. 아이들을 데리고 10미터 전진하는 데는 대략 10분이 걸리므로 평지 직선길은 많은 구경거리가 된다. 게다가 오랜만에 가는 길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백주년 기념관에서

정문은 늘 그랬듯이 볼품없는 평범한 문이다. 정문까지 가는 도로에 포장이 바뀌었는데 요새는 학생운동이 없는 까닭에 학교 앞이 깨끗한 길이 되었다. 잔류 최루탄 가스가 없으니 정문앞에 가서 타의에 의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은 잔디가 펼쳐져 있고 여기서 꽃을 구경하고 조금 지나가니 멋진 돌건물이 나온다. 여기가 100주년 기념관으로 박물관을 겸하고 있는데 강당도 있어서 완공된지 얼마안되서 부터 음악회를 열었었다. 아마도 1988년에 이 강당에서 사물놀이 연주회를 했었는데 새로지은 멋진 건물에서 신나는 음악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연주회 홈페이지:
http://www.severanceorchestra.com/zboard/view.php?id=concertinfo&no=7

어렴풋이 백주년 기념관에 혼자 앉아 들으면서 나중에 아내와 같이 음악회를 감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나도 모르게 옆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뛰어 계단을 올라가더니 건물로 들어가버렸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찾으러 따라가는 동안 마침 그날(8월25일) 7시에 음악회 정기 공연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시각은 이미 6시50분.

세브란스 의대생을 중심으로 하는 연주회가 열리는 것인데 입장은 무료였다! 아이들이 음악회의 분위기를 맛보게 해주려고 건물안 강당에 들어가보니 자리는 많이 여유가 있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2번째 연주곡으로 공연하는 것이었다. 그곡은 집사람도 좋아하는 곡이다. 아이들이 지루한 연주를 견디기만 해준다면 두번째 곡 1악장 주선율의 연주 부분까지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음악을 들으면서 --- 커피는 없더라도,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 데이트가 가능하지 않은가!

큰 딸과의 데이트

첫번째곡은 시벨리우스의 곡이었다. 장 시벨리우스의 곡이란 것은 알았으나 순서지를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는 어떤 곡인지 내게 물었다. 나는 자신있는 목소리로 "Be Still My Soul" 이라고 대답했다. 시벨리우스의 곡 중에서 알고 있는 유일한 곡이기도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연주곡에는 물론 가사가 없지만 그 곡의 일부에 가사가 붙어서 곡목이 "내 영혼아 잠잠하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집사람도 좋아하는 가사였기 때문에 첫곡은 부담없이 감상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첫 선율이 장중한 피아노의 한음 한음에 맞추어 따라올 때 우리는 공통의 화제 생겨났다. 녹음된 음원과 달리 한음 한음이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아내의 얼굴에서 표정으로 전달되었다. 아이가 지루해 하면 연주회장이 소란해질 수 있어서 뒷자리에 앉았는데 오케스트라의 배치가 보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악기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초등학생 큰딸은 역시 피아노 협주곡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클라리넷을 보더니 '아빠가 아주 아끼는 클라리넷' 이라고 아는 척을 했다.

피아노를 좋아하는 큰딸은 그래도 비교적 인내를 가지고 들는 귀가 있었지만 아들은 어두운 연주회장에서 재미없는 음악을 듣을 귀를 지니지 못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풀밭에서 뛰어다니고 싶었다. 아들이 조용히 엄마랑 회장을 나가자 큰딸이 제안했다. 앞에 가서 가까이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1악장이 끝나고 나서 박수 치는 동안 딸의 손을 잡고 앞에 있는 빈자리로 옮겼다. 앞자리는 악기 소리가 크게 잘들린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악기 연주하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주자의 앞쪽에 앉았더니 딸의 관심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었 듯 싶었다. 첼로 연주하는 언니들이 예쁘다는 둥, 아빠는 누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냐는 둥. 악기 연주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주자 얼굴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하는 딸에게 귓속말로 조용히 대답하느라 3악장은 어떤 선율을 감상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첼로 연주자들이 현 한줄을 손으로 튕기는 연주 모습을 보고 주법 한가지를 알았다. 아내가 옆자리에 앉아 있지 않아도 딸이 있었으니 큰 딸과의 데이트가 된 것도 좋았다. 딸을 둔 아빠는 이래서 딸 키우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지.

딸을 낳은 아내에게, "수고했어. 예쁜 딸을 낳아서." 그리고 "사랑해요."

키워드: 음악, 교육, 예능, 예술, 피아노, 양육, 연세대, 연주회, 리뷰, 이슈,
by 금메달.아빠 on 2012. 9. 1. 0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