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몸으로 배운 것이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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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 일이다. 1993년의 여름 방학 기간에 대학원 실험실에서는 온도 조절기를 만들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실험실에 배정 받자마자 교수님이 대학원생들에게 맡긴 과제인데, 전년도의 선배들이 만들어 둔 회로도가 있으니 참고해도 되지만 가급적이면 새로 회로를 만들어도 되는 것이었다. 나는 회로 전공이 아니었고, 회로 부품 지식이 얄팍하기 때문에 새로이 회로도를 그리기 보다는 기존의 회로도를 사용하여 기판을 제작하기로 했다. 나와 같이 온도조절기를 만들기로한 연구원생도 나의 의견에 동의하고 회로기판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이 친구는 회로를 보고 기판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감광 기판을 사용하여 인쇄기판(흔히 PCB)을 만들어 본 적이 전혀 없어서 그냥 연습삼아 회로 기판을 만들어 보고 있었고 나는 트랜지스터, 저항기 등의 부품의 크기를 고려하면서 기판 설계를 했다. 전년도의 연구원생들로 기판은 있었지만 이를 참고하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서 설계한 이 제작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방학에 바빠서 연구실에 많은 시간 있지 못했고 러닝 메이트인 이 친구(사실은 한 학번 후배)는 주야가 바뀐 생활 습관이어서 방학 내내 얼굴을 본적이 별로 없었다.

1학기 대학원생은 모두 4명이고 두명이 한조가 되어 온도 조절기를 진행하였는데, 우리조는 진행이 되지 않고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였다. 물론 주된 이유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였다. 한편 다른 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회로를 기판에 옮기고 설계를 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급기야는 우리조의 기판도를 빌려서 감광기판을 부식시켰는데 여기에는 커다란 실수가 있었다. 위아래를 뒤집어서 감광시킨 것이었다. 기판도에는 글씨(레터링, lettering) 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눈을 감고 하지 않는 이상 뒤집힐 일이 없는데도 뒤집힌 것이다. 나중에 물어 보니 똑같이 하기에 미안해서 대칭으로 했다는 것인데, 다리가 3개인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의 발 순서를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내가 낮시간에 없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어서 뭐라 할 여유도 없었고,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기만 했다. (모르긴 해도 이 글을 당사자들이 읽으면 많이 웃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쁜 나와 주야가 바뀐 친구가 마치 교대 근무하듯이 만들었던 온도조절기가 완성이 되고 전년도의 온도조절기와 그해의 온도조절기와 비교해 보아도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가을 학기부터 직접 사용해서 그 이듬해에도 후배 대학원생들이 두고 두고 --- 아껴서 썼는지는 모르지만 --- 사용하는 조절기가 되었다.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와서야 말이지만, 중고등학생 때 친구가 조립식 전자기구(흔히 Kit 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조금 상대하다 보니 나도 친구따라 강남간다듯이 세운상가에 가서 전자 부품을 사다가 몇번 조립하다보니까 어느샌가 동판을 부식시켜서 기판을 만들어 본 것이 대학원생 때 그나마 풍월을 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친구는 계속 전자 기구에 관심을 가지더니 결국 전자 공학을 전공했고 나는 굳이 전자기구에 관심이 없어서 전자공학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손으로 익히고 몸으로 배운 것은 오래 간다. 어떤 것은 평생가기도 한다. 학원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손과 몸으로 배운 것이 더 오래가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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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메달.아빠 on 2011. 12. 26. 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