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설을 읽기 보다 소설가의 삶을 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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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중에는 감동적이고 눈물을 흘리며 오래 오래 기억하는 것들도 있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다가 나중에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통해 감동을 받고 도움이 된다는 것은 좋은일이다.

수년전에 문득 한 동화 작품이 기억나서 원작을 찾아 다시 읽고 싶어진 일이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으로 거인의 집에 항상 겨울이 되어버렸다는 동화였다. 마지막에 거인은 나무 위에 올라간 어린이에게 놀라서 묻는 대목이 있는데 그부분은 "Who art Thou?" 였다. 두려움에 찬 거인의 질문인 셈이다. 이렇게 감동적인 작품을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조사해 보는 것은 매우 실망적인 결과를 알게 되는 것이며 그의 작품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다.

작가의 머리속에서 나온 말, 또는 글과 삶은 매우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염세주의 철학자도 가르침과 동떨어진 삶을 살며 젊은이들은 비관에 빠져 자살해서 사회문제가 되어도 정작 철학자는 명성이 올라가게 되자 염세철학을 버리고 90이 넘도록 장수했다는 사람도 있다. 오스카 와일드 처럼 동심을 다독거리는 한편 그의 부도덕한 삶은 그칠줄 몰랐다.

인격은 말과 행실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그럴듯한 작품을 발표했다고 해서 행실과 생각이 훌륭한 것으로 안이하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을 때가 되면 자녀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자녀 양육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다.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을 마치신 친척의 삶을 보아도 그렇고 나 자신을 보아도 그렇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가르치고 본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좋아하여 읽는 편이 아니지만, 소설 내용을 읽기 전에 먼저 소설가의 삶을 읽기 원한다. 말을 번지르르하게 꾸며서 수사학을 통달했다고 하더라도 삶의 능력이 없으면 회칠한 무덤을 보는 것과 같다.

요즘은 트위터에서 많이 말을 내 뱉듯이 독설을 퍼붓고 자신의 말에도 사려가 없는 사람일 수록 주목을 받고 그 재미로 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들은 어쩌면 모두가 소설가로 살고 있다. 하지만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단문의 지저귐이나 주정보다 삶을 보여주고 싶다.

그것이 다음 세대를 기르는 희망이다.
by 금메달.아빠 on 2011. 12. 6.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