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양초등학교/1회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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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반짝이는 메달

  벌써 30여년전이 되는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졸업당시 받은 금메달을 보면서 문득 모교 초등학교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나는 5학년 때 서울 성동구 자양동에 있는 신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처음으로 분교 되어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 처음 배당되어 갔을 때 친구들은 학교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래서 뚝섬에 지었으니 뚝섬 국민학교가 될 거라는 둥, 뚝도 국민학교가 될거라는 둥, 근처의 지역명이 노룬산이니까 노룬산 국민학교가 될거라는 둥 의견이 많았다. 그러던 3월 어느날 음악 시간에 교과서에도 없는 노래를 배우게 되었는데 가사 맨 끝이 "새볕이 되리라 신양 어린이"로 끝나는 것을 보고서 비로소 교가를 통해 "신양" 국민학교가 학교이름인줄 알게 되었다. 그후 얼마후에 교표가 정해진 것 같고 큼직한 교표 모양의 이름표가 학생들의 가슴에 달려지게 되었다.

(신양 초등학교의 메달의 뒷면에는 졸업년도 등이 새겨져 있다.1981년 2월14일)

신설이어서 그런지 6학년은 없었고 그래서 5학년이 최고학년이었다. 최고 학년이라고 해도 별것 아니지만, 아침 등교하는 교문 앞 횡단 보도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것도 보통은 6학년에서 할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5학년때 부터 하게 되었다. 길 한가운데서 안전모를 쓰고 한 학생이 그야말로 교통 순경의 역할을 담당하여 호루라기를 불면서 손짓으로 자동차를 세우고, 그에 맞추어 횡단보도 양쪽의 친구들이 깃발을 앞으로 내밀어 주는 것으로 등교길을 지켜 주었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서도 교통정리는 계속하였다. 5학년 후배들은 교통정리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여전히 최고학년이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는 쌩쌩 바람이 부는 길에서 교통정리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학교가 생기고 1년 동안은 체육시간의 처음 몇분은 운동장을 돌아다니면서 돌맹이를 줍고 떨어진 휴지조각을 줍는 것이 흔히 하던 일과였다. 신설 학교의 자랑거리중 하나가 운동장이 넓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양 초등학교 만한 운동장 넓이는 주위의 학교에 비해 월등히 넓은 것이라고 들었다. 그 덕분에 돌맹이가 많았다. 

운동장에 먼지가 날리지 않게 하려고  소금을 뿌리기 위해서 한달에 한번 정도는 전교생이 집에서 소금을 라면 봉지 한개 정도의 분량을 가져와서 뿌리기도 했다. 운동장이 기본적으로 작은 깨진돌이 많아서 학교측에서는 모래를 자주 사다가 부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소금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같다.

심겨진 나무가 별로 안되기도 했고, 나무의 이름표가 없어서 분유 깡통의 뚜껑을 이용하여 페인트를 칠하고 이름표를 만들어서 붙이는 일을 선생님들이 하실 때 우리들은 따라다니면서 도와드리기도 했다.

신설 학교의 첫 학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었다. 책상걸상이 전부 새로운 것이었는데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2명이 앉는 책상이 아닌 최신식의 합판으로 윗판을 만들어서 가볍고 가방걸이가 있는 1인용 책상이었다. 그래서 책상에 낙서하지 않도록 항상 선생님께 주의를 들었지만 개구장이 학생들은 마음놓고 낙서를 하곤했다.

특히 좋았던 시설은 교실에 싱크대가 있었던 점이다. 본관 건물의 한 쪽 끝에 있는 5학년 9반 교실은 다른 교실보다 복도 폭만큼 넓었다.처음부터 복도끝 의 교실은 교실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교실문이 앞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도로 나가는 한개의 문밖에 없었다. 이 덤으로 만들어진 복도 공간에 싱크대가 있었고 실과 시간에 음식을 만들었다든지 하면 싱크대에서 설겆이를 할 수 있었다. 과학실도 아니고 가사실도 아닌 교실 안에 싱크대가 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어쨋든 다른 반 친구들은 우리 교실을 부러워했다. 나중에는 다른 반 여학생들이 실과시간에 만든 나박김치, 종지를 가지고 와서 쉬는 시간마다 냄새를 풍기며 설겆이를 했다. 그래도, 우리반 친구들은 인심이 좋았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베푸는 것이라고나 할까.

신설학교에는 기존 분교하기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반장 부반장 또는 학급임원을 해본 학생이 극단적으로 적었다고 기억한다. 어느날 수업시간에는 담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누가 반장부반장을 했으면 좋겠는지 고민이 많이 된다고 하셨다. 내가 기억하기에 다른 초등학교에서는 남학생 한명이 반장을 하고 여학생 한명이 부반장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회장 부회장도 반장 부반장이 겸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양 초등학교에서는 남학생 중에서 반장 부반장 2명을 뽑고 여학생 중에서도 2명을 뽑았다. 아무리 남자 반장이 혼자서 학급일을 도맡더라도 여학생 반장도 있었다. 요새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선생님들께서는 어린이 들에게 기회를 주신것으로 생각된다. 아이들에게 감투정신을 길러 주셨다고 믿는다.

1회 졸업이기 때문에 특별히 배려해 주신 것이라고 여기고 감사한 것은 개근상장이나 우등상장등 상을 받는 어린이들에게 금메달을 주었다. 벌써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변색하지 않는 메달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나중에 중학교에서도 금메달을 받았지만 2년도 못되어 심하게 변색되어서 퇴색한 메달이 되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특별한 메달임에 틀림없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글씨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아빠가 무슨 올림픽에서 딴 메달인것으로 생각(착각)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훌륭한 피겨 스케이트 선수가 메달을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생 때에는 주위에 밭도 많았고 밭길 사이를 지나서 등교길에 상추나 양배추를 심고 뽑는 장면을 흔히 보아왔다. 그런데 졸업후에 이사하였기 때문에 한참 후에 가보았을 때는 이미 밭은 없어졌고 주택들로 가득차 있었다. 아마 지금은 더 많이 바뀌어서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한번 쯤 모교의 운동장을 둘러보고 싶다. 선생님이나 당시의 친구들은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어린 학생시절에 받은 교훈과 격려 칭찬으로 힘을 얻고 격려를 받은 운동장에 말이다.

<후기>

가끔 신양초등학교를 키워드로 블로그에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있어서 오랜 만에 학교 홈페이지라는 데를 처음으로 검색해 보았더니 홈페이지에는 "1979. 04. 11 ·서울신양초등학교 개교(972명, 70학급)" 라고 공개되어 있더군요. 학생들은 3월2일부터 등교했었으니 한 달 동안은 개교도 하지 못한 학교에 다닌 셈이죠. 30년 전 기억에도 분명히 학교 이름이 없어서 반 아이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가 교가를 배우면서 학교 이름이 처음으로 "신양" 인줄 알았는데 당시 선생님들로 이름도 없는 학교에 계셨던 거군요.

기왕 선생님들 이야기가 나왔으니, 당시의 가르쳐 주신 담임 선생님 정선생님, 김 선생님 감사합니다. 성함은 기억하지만 비공개로 올립니다.

<후기 2010년 8월>

혹시 졸업생 카페 운영하는 동창들이 메달 사진이 필요하면 해상도 높은 사진으로 보내 드릴께요. 여기 게시된 메달 사진을 수집해도 됩니다. 유감스럽게 졸업사진첩은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해서 올릴 수가 없군요. 여러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무단 올림도 조심스럽지만요.

by 금메달.아빠 on 2010. 7. 12. 2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