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에 어머니가 회상하는 할머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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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시골에서 오랜 동안 사셨는데 어머니가 태어나서 자라난 곳은 용인군 두메산골이었다. 이곳은 기억이 정확하다면 1977년에 전기가 들어왔고 30여 가구가 사는 마을에 전화기는 단 한대 뿐이었다. TV는 대략 서너대가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몇몇이 어울려 다니면서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텔레비전을 늦게 까지 보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의 집에서 본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집 어른이 보는 것을 끼어서 보다보면 금새 재미없는 뉴스만 했기 때문이다. 수도물이 없이 우물물을 두레박에 길어서 마셨는데 물갈이를 하는 사촌들은 시골에 오면 며칠간 고생을 해야 했다.

외할머니는 1890년대에 태어나신 분이었다. 국사시간에나 등장하는 갑오경장의 격동의 시절에 나셔서 어머니와 외삼촌을 기르신 분이었다. 한국 동란(6.25 사변)에도 이 시골은 특별히 피해가 없이 지나갈 정도로 두메산골이었는데 어머니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같은 동네에 고등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혼자서 읍내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겨울에 해가 일찍 떨어지면 20리(10km)의 길을 두시간이나 걸려서 달빛을 의지하며 걸어와야 했던 것이다. 지나가는 소수레가 있으면 태워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혼자 어둠을 헤치고 오셔야 했다.

외할머니는 혼자 걸어오는 어머니를 마중나오기 위해 할아버지 저녁을 차리고 나서는 당신은 저녁도 안드시고 20리 길을 찾아오셨다고 한다. 추워지는 겨울 날씨에 딸이 혼자 밤길을 걷는 것이 안타까와서 길동무가 되어 주신 것이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오랜 동안 같이 사셨고 다른 이모들 보다도 어머니가 결혼한 후에 딸이 보고 싶으셨다고 한다.

이제는 어머니도 당시의 외할머니와 비슷한 연세가 되셨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좀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한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은 예전에도 우리 아들들에게 전달되었었다. 여름 방학 때 형들이 외할머니댁에 가면 하루 종일 산에서 나무를 베어 지게에 지고 와서 도끼로 장작을 패고 마른 나뭇잎을 모아와서 산더미 같이 쌓아 두었다. 겨우내 쓰실 땔감을 마련하곤 했다. 이 일은 동네에 적지 않은 소문이 나곤 했다. 시골 태생이 아닌 서울 태생의 외손자들이 장작을 패는 일이 새삼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는 마음대로 불을 때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외손자들이 마련해 드린 낭구(나무의 사투리)를 아껴서 쓰셨다는 것이다.

나는 형들이 텔레비전도 없고 놀것도 없어서 그냥 장작패는 것을 재미삼아 하는 줄만 알았었다. 내가 직접 지게를 져보고 나무를 톱으로 잘라 산에서 지고 와서 도끼로 장작을 패고 나서야 비로소 재미로만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외할머니의 사랑을 직접 보답해 드리지는 못해도 아들들(손자들)이 가서 조금이나마 대신 효도를 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었다. 지금은 내가 어머니께 사랑을 보답해 드리지 못해도 아이들이라도 어머니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효도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눈물을 흘리시며 어버이날에 들려주신 외할머니 이야기에 나도 고마움과 죄송함에 눈물이 고인다.

by 금메달.아빠 on 2011. 5. 10. 23:29